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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2.16 이어폰과 무상급식
며칠전 다음 아고라에 올라온 글이 눈길을 잡아 끌었습니다.

애들 숫가락을 뺏다니요

가난을 천벌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 그리고 철없고 죄없는 아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새겨넣은 대한민국...

분노와 슬픔없이는 읽을 수 없는 글이었습니다.

무상급식에 대한 글들이 많아 사족같이 여겨지지만 오늘은 제가 겪은 일화를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2008년 11월의 어느 금요일 오후로 기억됩니다.

제가 다니던 회사에서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무상으로 도시락을 공급하고 있었고, 직원들이 정기적으로 봉사를 나가 도시락 배달에 참여했습니다.

동사무소와의 협조하에 도시락을 받을 저소득층 아이들을 선발하고, 도시락을 동사무소에 갖다주면 학생들이 도시락을 가져가고 전날 받았던 빈 도시락통을 다시 가져다 놓았습니다. 

배달할 곳은 많고, 동사무소가 문을 닫기 전에 배달을 끝내야했기 때문에 이래저래 몹시 서둘렀던 기억이 납니다.

쌀쌀한 날씨에 양손에 도시락을 들고 뛰어다니는게 힘들기는 했지만, 이 도시락으로 아이들의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을거란 생각에 참 뿌듯했었습니다.

마지막 동사무소에 도시락을 갖다드리고 빈 도시락통을 받아 배달용 봉고버스에 실은 뒤, 봉사단체에 근무하시는 분과 담소를 나누며 담배를 한대 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동사무소로 들어가는 여학생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여학생은 상당히 마른 체구에 양쪽 귀에는 하얀색 이어폰을 끼고 있었습니다.

동사무소 앞에서 고개를 숙인채로 잠시 좌우를 살피더니 동사무소 안으로 서둘러 들어갔습니다.

잠시후, 그 여학생은 제가 지금막 배달했던 도시락 하나를 들고 동사무소를 나와 총총걸음으로 사라졌습니다.

옷차림만 봐서는 또래 여학생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이더군요.

하지만, 여학생이 사라지고 난 뒤에, 무료 도시락을 받기위해 매일 동사무소에 찾아오는 그 여학생이 과연 어떤 심정일까 한동안 생각해 봤습니다.

아주 잠시 본 얼굴이지만, 불안이 섞인 그 표정은 마치 사진으로 찍어 머리속에 넣어둔 것처럼 오랜동안 잊혀지지 않더군요.

얼마나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일까요...

혹시 친구나 아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까 매번 동사무소에 올 때마다 불안불안 했을겁니다.

그 여학생이 끼고 있던 이어폰은 나도 또래 아이들과 비슷한 아이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한 마지막 징표같은 것이었겠죠.

고등학생, 아직 먹고사는걸 걱정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 아닌가요?

극심해져가는 빈부격차와 사회 안전망의 부재로 인해 아이들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연간 국민소득이 얼마이고, 무역규모가 세계 몇 위이고, G20을 개최하고...

사실 이런게 뭐 그렇게 중요하겠습니까

정작 가난하고 힘없는 아이들에게 밥도 배불리 먹이지 못하는 주제에 어디 그딴걸 자랑이라고 연일 떠벌릴 수 있겠습니까

물론, 복지사업의 집행은 운용 가능한 예산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 합니다.

하지만,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을 어떻게 집행하는지는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닌가요?

더 급하고, 더 중요한 일에 예산이 우선적으로 배정되어야 합니다.

물론 어떤 일이 더 급하고 중요한지는 가치관과 철학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먹이는 일, 그리고 가난한 아이들의 감수성에 상처를 주지 않는 일은 최우선에 놓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릴때부터 자괴감과 열등감에 시달리며 자신의 경제적 위치를 매일매일 확인하며 산다는 것...

너무 끔찍해서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여유있는 아이들의 무임승차 보다, 가난한 아이들의 자존감을 위해 비용을 지불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만약 무상급식을 실시할 수 없다면, 왜 다른 사업을 위한 비용이 무상급식보다 우선순위에 있어야 하는지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복지를 단순히 시혜라고 생각하기에는 우리나라가 이미 너무나도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했습니다.

아이들의 상처가 더 깊어지기 전에, 아이들의 자존감이 더 무너지기 전에, 정말로 "가난"은 "불편"에 불과한 대한민국이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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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라드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