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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4.20 탈출을 꿈꾸는 자들에게 바치는 로큰롤 - 남쪽으로 튀어
저는 원래 일본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제가 대학교에 막 입학했던 시절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을 읽는 것이 젊은이들의 문화 아이콘으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전공투를 경험한 무라카미 하루키는 혁명의 실패로 인해 자신의 내면에 남겨진 깊은 상실감을 소설로 승화시켰고, 일명 운동권 끝물로 불리던 90년대 중반 학번들은 더이상 혁명과 이념이 의미를 갖지 못하는 대학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혼란스러워 했었습니다.

"상실의 시대"는 이미 자본주의가 깊게 스며든 대학에서 좌표를 잃고 흔들리는 청년 지식인들에게 하루키가 들려주는 째즈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상실의 시대에 감명받아 이후 하루키의 거의 모든 작품들을 읽어봤지만, 상실의 시대만큼 깊은 여운을 주는 작품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기는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그 이후로 일본 작가들의 책이 봇물 터지듯 번역되어 나오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정서적인 차이도 존재하고, 번역의 미숙함 때문에 짜증이 나는 경우도 많아서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일본소설을 보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던 중 최근에 서핑을 하다가 아주 우연히 어떤 블로거께서 추천사를 남기신 것을 보고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라는 일본 소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오쿠다 히데오의 첫 작품이었는데, 일단 감상을 한마디로 기술하자면 "유쾌하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은 초등학교 6학년인 주인공 지로의 성장을 기본테마로 잡고 있습니다.

남학생이 주인공인 성장소설에서 흔히 다루어지는 이야기들, 예를 들면 동네 선배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거나 돈을 뺏기는 사건, 같은 반 여학생과의 소소한 연애사건, 첫 몽정과 여탕 훔쳐보기 등이 다루어집니다.

하지만, "남쪽으로 튀어"에는 이런 전형적인 성장소설의 기본줄기 위에 지로의 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고찰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지로의 아버지는 종래 과격 운동권이었다가 오랜동안 계속된 조직 내부간의 갈등에 염증을 느껴 이제는 무정부주의자가 된 인물입니다. 연금을 수금하러 온 공무원과 경찰들에게 온갖 악담을 퍼붓는 분이죠.

아들인 지로의 수학여행 경비가 너무 비싼 것은 선생님들이 여행사와 결탁하여 뇌물을 받기 때문이라고 학교에서 소란을 피우기도 합니다.

우연히 주인공의 집에 얹혀살게 된 아버지의 후배가 반대파에게 테러를 감행하면서 도쿄에서 살던 주인공과 가족들은 남쪽 섬나라로 이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가족이 정착하게 된 조용한 섬마을에 리조트를 건설하기 위한 강제철거가 시작되면서 집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남쪽 섬에 살게되면서 지로와 가족들은 학교에 대해서, 선생님에 대해서, 그리고 공동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 소설 최대의 장점은 이런 묵직한 주제들을 아주 흥미롭고 가볍게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소설은 도시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공동체란 무엇인지, 자연을 벗삼아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땀흘려 일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루키의 소설이 째즈였다면, 오쿠라 히데오의 소설은 여행을 떠나며 듣는 로큰롤같은 느낌의 소설이었습니다.

일상에서 잠시라도 탈출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책을 읽는 잠깐 동안이라도 여행을 다녀오는듯한 행복감을 느끼실 수 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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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라드76